한눈에 보는 세계사 세계1차대전 세계2차대전 배경 진행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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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세계 대전 이 일어나기 전의

세계는 국제 정세가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었죠.

그러던 중 제 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

당시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가 먼저 합병해 버립니다.... 그 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육군 대훈련을

보러 갔을 때 세르비아의 범 슬라브주의 비밀 결사에 

소속된 한 청년에게 피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를 사라예보사건이라고 합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공포하고 독일에 원조를 요청합니다.

한편 러시아도 개전과 동시에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연합국에 영국, 일본, 중국, 삼국 동맹을 이탈한

이탈리아가 가담하였으며, 동맹국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포함하여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이 가담하게 되죠.......... 이로써 전쟁

은 전 세계로 확대 됩니다...

 

☆참고로 개전하기 전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삼국협상과 삼국 동맹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삼국 협상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삼국 동맹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가 있었습니다.

 

개전 후 독일은 우선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합니다......이에 벨기에 침공을

강력하게 비난하며 영국도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되고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도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합니다.....

독일은 벨기에 점령 후 프랑스를 격파하고 러시아를 공격하여 전쟁을 단

기간에 끝내려고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영국과 일본은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점령해버립니다......

한편 독일은 영국에 군수 물자를

​원조하는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무제한 잠수함 작전 이라고 합니다.

 

이에 미국의 상선까지 피해를 보게 되자 

미국도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하고 이 무렵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가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고 전선에서 이탈하고 이에 독일은 서부 전선

에서 총공격을 펼치게 되나 실패하고 동맹국이 승리할 가망이 없다

고 여긴 오스만 제국과 불가기아, 이어 오스트리아도 항복합니다

그리고 독일도 1918ㄴ ㅕ ㄴ 혁명이 일어나 새로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제 1차 세계 대전이 막 을  내리게 됩

니다.........

 

제 1차 세게 대전은 그 당시까지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었습니다.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이에 따라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군비 축소, 독일 영토 일부 및 해외 식민지 상실 등으로 독일은 막대한 피해

를 보았고 이 조약에 따라 최초의 국제 기구인 국제 연맹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미국과 소련의 불참과 침략에 대한 무력 제재가 불가능하

였기 때문에 제 1차 세계 대전 종전 21년만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죠.

 

 

 

제 2차 세계 대전

경제 공황과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

미국에서 경제 공황이 발생하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제일의 공업 생산력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생산 과잉과 과열한 주식 투기 끝에 주가가 폭락하였고,

그 여파로 많은 공장이 쓰러지고 은행이 문을 닫았으며, 농산물 가격이 폭

락하고 실업자가 급증하였다.

이를 경제 공황이라고 하는데, 1929년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 경제 공황의 원인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불균형으로

범람하는 미국 제품을 소화할 만한 구매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유럽은 대전의 황폐에서 미국의 원조로 재건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미국의 경기 변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미국 내부에서는 독점 자본에 의해 고도로 통제된 공업 제품

가격 때문에 농민과 일반 노동자의 구매력이 저하되면서도,

이것이 신용의 팽창으로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신용이 원활성을 잃자 주가의 폭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경제 공황이 발생하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농업과 공업 등 경제 활동에 개입하여 생산을 조절하였으며,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해 국가 자본으로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은 자본주의의 자유 방임주의 원칙을 포기한 것이었으나,

경제 공황을 극복하여 미국을 새로운 경제 발전의 길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도 자치령과 식민지를 하나로 묶는

 블록 경제권을 이루어 경제 공황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경제 공황의 여파로 잔체주의 국가가 대두하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공황은 유럽 국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많은 기업이 파산하였으며,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그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노동 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산층이나 자본가들 중에는 국가에 의한 강력한 통제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에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당을 중심으로

일당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독일에도 히틀러가 나치 당을 앞세우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1934년에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하였다.

일본에서는 공황 이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군국주의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나라들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전체의 목표 달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였다.

또한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 가치를 가진다는

주장을 근거로 국민 생활을 간섭 및 통제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를 전체주의라 하며,

전체주의 국가들은 군비를 강화하여 침략 정책을 추구하였다.

먼저 일본은 만주 사변에 이어 중 ․ 일 전쟁 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였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하였고, 독일은 재군비를 선언하고

비무장 지대를 점령하여 국제 긴장을 고조시켰다.

또한 전체주의 국가들은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워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의 침략으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인류사에서 가장 거대한 전쟁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제 1차 세계 대전이 지나간 자리에서 피어나던 발전과 성장을 멈춰 버리게 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던 세계 경제 공황으로 세계는 어디론가

 뚫고 나갈 탈출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탈출구를 누군가 뚫어주었다.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그와 함께 일어난 이탈리아와 일본이 그 주범들이다.

먼저 이탈리아는 과거 로마 제국을 계승한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할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은 중부유럽에 늘어가는 자국의 인구를 위한 생활공간을 얻고 싶어 했다.

또한 일본은 “대동아(大東亞) 공영권”의 새로운 중추로서의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세 나라는 하나의 동맹을 형성했는데,

로마 ․ 베를린 ․ 도쿄 추축 또는 간단히 추축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전에 일본은 1931년에 만주를 병합했고, 1937년에는 중국을 침공하여

중 ․ 일 전쟁을 일으켰다. 한편 1500여 년이 넘는 시간 만에 로마에

수도를 둔 새로운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려고 했던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네디또 무솔리니는 1935년에 에티오피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는 그동안 한번에 한발자국씩 자국을 영토를 넓히려는

그의 목표를 성취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직접적으로 위반 하면서 라인란트를 점령하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자 히틀러는 더욱 힘을 얻었다.

1938년에 그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독일의 일부로 만들었고,

193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얻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하게 불만을 표했으나,

 전쟁을 피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어떤 구체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 이어 독일이 폴란드의 일부까지 요구하자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독일이 1939년 8월 24일에

소련과 독 ․ 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직후인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하자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최후통첩을 공포 하였다. 그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맺은 상호협력조약에 따라 독일의 공격을 저지할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 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2일간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제 2차 세계 대전의 막이 오르고야 말았다.

 독일이 폴란드 서부를 점령하자,

소련은 폴란드 동부와 발트 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를 공격하였다.

독일이 북유럽에 이어 프랑스 북부를 점령 하자,

이 무렵 아프리카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던 이탈리아도 독일 편에 서서 참전하였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저항이 계속 되었고,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 장군은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고 독일과 전쟁을 계속하였으며,

프랑스 국내에서도 레지스탕스가 조직되어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

한편

독일은 외로이 항전하던 영국에 대해 공습을 감행하였으나,

처칠의 지도 아래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자, 독일은 영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렇지만 히틀러의 진정한 목적은 소련 정복에 있었다.

독일은 소련을 기습 공격하여 영토 깊숙이 진격하였으나 소련군의 거센 저항과

혹독한 추위에 부딪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여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독 ․ 소 불가침 조약 또한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에 앞서

1941년 4월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동방에 대한 근심을 없애고

유럽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다

일본은 중 ․ 일 전쟁(1937)을 일으켜 중국 본토로 진출하였으나,

중국군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혀 전쟁이 장기화 되었다. 때마침 유럽에서

독일이 프랑스 북부를 점령하자,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였다.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미국 ․ 영국 등이 경제 봉쇄로 대응하였다.

미국은 원래 1935년의 중립법에 따라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해 왔으나,

1937년 가을부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0년 11월에 대통령에 세번째로 당선된 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처칠은

1941년 8월 대서양 위의 군함에서 회담을 열고, 위의 선언을 발표하였다.

모두 8조로 된 이 헌장에서 제시된 원칙은 제 2차 대전이 끝난 뒤, 국제 연합 헌장에 구체화되었다.

대서양에서 회담을 개최한 후 4개월 뒤인 12월 7일 미국 ․

영국의 경제 봉쇄에 대응하여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기에 일본은 동남 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서남 태평양의 제도들을

차례대로 점령하여 “대동아 공영권”의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 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급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패한 뒤 서서히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다. 

 


전체주의 국가가 패배하고 연합국이 승리하다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전세계로 확대되었다.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2개월 후인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였고, 11월에는 미 ․ 영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43년 1월에는 미 ․ 영 양국의 카사블랑카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양국은 동맹국의 무조건 항복 방식을 선언하였다.

다음 달인 2월에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항복하였고, 5월에는 애투 섬의 일본군이 전멸 당하였다.

1943년 7월에 시칠리아 섬이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진입하였다.

 이와 동시에 무솔리니의 반대파인 바돌리오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솔리니는 정권을 잃고 체포되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바돌리오 정부는 곧 파시스트 당을 해산하고, 9월에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어 독일에게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는 추축국 진영으로부터 가장 먼저 탈퇴 하였다.

 

한편 체포됐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아부루치 산맥의 한 호텔에 유폐되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독일 친위대 부대장 스코르체니 대위를 비롯한 9명의 병사에게 구출되었으나,

다음 해인 1945년 4월 28일 총살되었다.

한편 이탈리아가 항복한 이후 미 ․ 영 ․ 중 삼국은 카이로 회담을 열고 카이로 선언을 발표 하였다.

카이로 선언의 내용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전쟁 뒤의 일본 점령지의 반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한국의 독립과 만주 ‧ 대만의 중국 귀속을 약속하였다.

이후 1944년 6월에 미 ․ 영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7월에는 일본군이 임펄 작전 퇴각 명령을 내렸고, 사이판 섬의 일본군이 전멸 하였다.

그리고 도조 내각이 사퇴하고, 독일에서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고,

10월에는 미군이 레이테 섬에 상륙하였다.

11월에는 미국의 초공위 요새인 B-29 폭격기의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화 되었다.

 다음해인 1945년에는 필리핀마저 연합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한편 45년 1월에는 소련군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점령하였고,

이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동부로부터 베를린에 다가왔다.

2월에는 미 ․ 영 ․ 소 삼국의 얄타 회담이 열렸다. 얄타 회담의

내용은 패전국에 대한 처리, 국제 연합의 창설,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에 관한

협의, 소련의 대일 참전 따위에 관하여 협의하였으며, 얄타 비밀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얄타 회담에서 체결된 얄타 비밀 협정 의 내용은 

독일이 항복한 후 3개월 이내에 소련이 참전할 것과 참전의 대가로

소련은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차지하고 뤼순 조차권(旅順租借權)을 회복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다음달인 3월에는 미 ․ 영 연합군이 라인 강을 도하하였고,

4월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엘베 강에서 합류하였다.

같은 달 30일 히틀러가 자살 하였고, 연합군의 압박을 받던 독일이 1945년 5월에 마침내 항복하였다.

독일이 항복함에 따라 연합군은 이제 그들의 관심을 일본 제국을 정복하는 데 돌렸다.

한편 45년 3월에 이오 섬의 일본군이 전멸당하고 4월에는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였다.

3개월 후인 7월 16일에 미국의 원자 폭탄 실험이 성공함에 따라 연합국의 정상들은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상륙작전 때 미군 1백만명을 희생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10일 후인 7월 26일에 미 ․ 영 ․ 소 삼국의 포츠담 회담에서 발표한

미 ․ 영 ․ 중 삼국의 『포츠담 선언』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 성격으로 발표하였다.

이 포츠담 회담에서는 전후 처리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하였는데,

여기서 채택되었던 포츠담 선언의 내용은

일본의 항복 조건은 제국주의적 지도 세력의 제거, 전쟁 범죄인의 처벌,

연합국에 의한 점령, 일본 영토의 제한, 철저한 민주화 따위이며,

한국의 독립도 이 선언에서 약속되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은 이제 국제적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소련도 옵서버

자격으로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여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연합국에 약속하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독일전선에 투입한 병력이 극동 방면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8월 상순으로 결정하였다.

한편 일본의 스즈끼 내각은 포츠담 선언에 대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약 10일을 보냈고, 일본 내각은 막후접촉을 통해

소련이 연합국과의 평화협상을 중재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일본이 오랫동안 포츠담 선언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미국은 더 기다릴 수 없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1시 45분 『에노라게이』라고 이름 붙인

미국의 초공위 요새 B-29 폭격기 한대가

태평양상의 미국 테니만 기지에서 조용히 발진하였다.

8월 6일 일본인들의 눈에는 하늘을 높은 고도로 날아가던 B-29 폭격기에서 떨어지고

있는 조그만 낙하산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보게 된 마지막 풍경이 되고 말았다.

정확히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조그만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진 원자폭탄은 섭씨

 수백만도의 열을 발산, 십만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순간에 무려 섭씨 300.000도에

이르게 된 불기둥은 1초 후에는 그 반경이 무려 250m로 부풀었다. TNT 500t에 이르는

화력을 가진 이 원자폭탄의 폭발로 인하여 히로시마 주민 7만8천1백50명이 순식간에 몰사하였다.

 

 다음날인 8월 7일 스즈끼 수상은 천황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것을 종용하였다.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가 된 히로시마는 뼈대만 앙상히 남은 몇 채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폐허의 공터로 변하고 말았으며, 30만 명의 시민들 중 1/3이 생명을 잃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폭발의 직접적인 충격으로 사망하였고,

폭발 직후 전도시를 뒤덮은 열폭풍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였다.

또한 치명적인 방사선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도 매일 수없이 죽어갔다.

7km 상공까지 버섯 구름을 솟구치게 한 이 거대한 원자폭탄의

폭발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던 미 해군 티베르 대위는 폭발의 충격이

16km가 넘는 지역의 상공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이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투하한 원자폭탄은 평화롭던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이틀 뒤인 8월 8일 오후 6시 몰로토프 소련 외상은

사토 주소련 일본 대사에게 『소련 정부는 내일 일본과의 전쟁상태에 돌입함을 선언한다』고

통보하였다. 그리고 9일 새벽 소련 공군과 육군은 만주와 북한으로 일제히

진격하였는데 일본군은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힘없이 무너졌다.

 다급한 일본 내각은 『최고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 포츠담 선언의 수락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오전 10시 30분 나가사키에 제 2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TNT 140t급인 이 폭탄으로 주민 2만3천7백53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25만의 인구가 살고 있던 조선 산업 도시 나가사키는 67%의 도시가 재로 변했던 히로시마의 경우와 맞먹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나가사키로부터 400km 떨어진 곳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미 공군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황색 불기둥이 2.5km 상공으로 치솟더니

곧 16km 반경을 뒤덮는 시커먼 버섯 구름으로 변했다고 한다.

두개의 원자폭탄으로 수없는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은 일본의 도쿄 방송은 미군의

 잔혹한 행위를 비난하면서 평화 협상을 요구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고 같은 날 소련도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일본 내각은 쉽게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날 오후 2시 30분부터

7시간동안 회의를 계속하다가 밤 11시 55분에 천황이 참석하는 어전 회의로 이어졌다.

여기서도 갑론을박을 계속하자 결국 천황이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였다.

이 때가 10일 새벽 2시 30분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천황의 국가통치대권을 인정한다는 양해 하에

 일본국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건부 항복문은 즉시 연합국에 통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연합국은 12일 새벽 0시 40분에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하여 『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국가통치권한은 항복 조항의 실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조치를 취할 연합군 최고 사령관 제한 하에 둔다』고 통보 하였다. 이것은 10일자 일본의 조건부 항복을 명백히 거부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12, 13, 14일 사흘동안 『최고전쟁 지도자회의』『각의』『황족회의』『어전회의』를 거쳐 14일 정오 그것도 천황의 최종 결심으로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였다. 천황의 『무조건 항복』은 14일 밤 11시 50분에 녹음돼 다음날인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로 방송되었으며, 일본은 마침내 전체주의 국가 가운데 마지막으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진 것은 1945년 9월 3일 도쿄 만에 정박하고 있던 연합군의 엄청난 무적함대들 중 한대인 미주리호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이날은 공식적으로 “일본에 대한 승전일”(Victory over Japan Day)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요구하였던 전쟁이 개전 6여년 만에 드디어 끝났다. 그러나 어렵게 얻어 낸 평화의 이면에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라는 불길한 유령이 숨어 있었다. 그러한 무기의 존재는 모든 후대들의 세계관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전쟁의 결과와 영향

제 2차 세계 대전도 제 1차 세계 대전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인류의 5분의 4를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1억 10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1945년 11월의 교황청의 발표에 의하면 전사자는 총 2206만 명, 부상자가 3440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 수치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3배나 되는 것이라고 한다. 1945년 10월 24일 국제 연합(UN)이 창설되었다. 얄타 회담에서 합의한 지 8개월 만이었는데, 이 국제 연합은 1946년 해체되었던 국제 연맹을 계승한 것으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먼저 국제 연맹의 경우는 미국과 소련 등의 강대국이 불참하였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경제적인 제재만 가할 수 있고 무력에 의한 제재가 불가능 하였다. 그러나 국제 연합은 경제적 제재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군에 의한 무력 제재도 가능 하였고, 유엔 안보리의 5개 상임이사국(미국 ․ 영국 ․ 소련 ․ 프랑스 ․ 중국)의 거부권이 인정 되었다. 국제 연합의 창설뿐만 아니라 제 2차 세계 대전 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식민지가 독립하였고, 우리나라 또한 일본의 항복을 계기로 독립하였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 점령에 의한 군정을 겪게 되었는데,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오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1945년 9월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는 남한의 모든 통치권을 미군정 하에 두는 미군정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미군은 일본군 대표와 조선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 시켰다. 한편 북한 지역에는 소련군이 평양에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공식적으로 결정하자 남한 지역의 국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신탁통치를 일제의 지배와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 지역에서는 신탁통치 찬성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민족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6년 3월에는 제 1차 미 ․ 소 공동위원회가 서울 덕수궁에서 열렸다. 미국 측 수석대표는 아놀드 소장, 소련 측은 슈티코프 중장이었다. 제 1차 미 ․ 소 공동위원회는 개막 벽두부터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초청 문제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소련 측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의에 따라 미 ․ 소 공동위원회가 열린 만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만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 측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도 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초청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못하자 미국 측은 5월 6일 임시정부수립문제는 뒤로 돌리고 38선 철폐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안했으나 소련 측의 거부로 결렬되었으며 5월 8일부터 무기 휴회로 들어갔다. 한편 46년 3월에 신탁통치와 통일 임시정부수립 등에 대한 대립으로 제 1차 미 ․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3개월 후인 6월에 미군정청 주도 아래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46년 6월 14일 김규식, 원세훈, 여운형, 허헌 등 좌우 온건파 대표들이 좌우합작회담을 개시했으며 6월 30일 미군정청장 하지 중장의지지 성명도 나왔다. 좌우합작회담은 각 파벌의 협박과 반대 등 숱한 진통에도 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7개 원칙』을 합의 발표했다. 그 내용은 좌우합작으로 민주통일임시정부 수립, 미 ․ 소 공동위원회의 속개 촉구,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 합의, 친일파 처리 원칙 합의, 정치범 석방과 테러 중지, 좌우합작위원회의 입법 기구 완전 통제, 언론 집회 등 기본권의 절대 보장 등이다. 그리고 이 좌우합작위원들은 미군정 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도 참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좌우 극단파들의 대립 격화, 이승만 측의 단정 추진, 미 ․ 소 냉전의 심화와 제 2차 미 ․ 소 공동위원회의 결렬 등으로 좌우합작은 끝내 힘을 잃고 말았다.  그 후 2년이 지난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하였는데 다음은 이 당시 김구의 평양행을 반대하여 운집한 청중들에게 김구가 절절하게 호소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독립운동으로 살아온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다. 더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여러분들은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달라.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봐야 한다”

 


이와 같은 연설을 하고도 막아서는 군중들의 눈을 피해 북행을 결행하였는데 비서와 아들을 대동한 단촐한 나들이였다. 연석회의에서 논의된 주제는 소련군과 미군의 철수, 그리고 철수 이후의 내전 불가, 민주주의 통일임시정부수립 후 중앙정부수립, 단독 정부수립 반대였다. 그리고 같은 달 27일 유엔의 남북한총선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위원단이 한국에 도착(1948.1.7)했으나, 소련이 입북을 거부(1948.1.23)하는 바람에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에서라도 총선을 실시하도록 다시 결의했다. 사태가 남북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수립으로 치닫자 김구, 김규식 등은 남북협상을 유엔한국위원회에 제안하는 한편 북쪽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남북협상의 현실적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하고 북한에서 48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남북협상의 현실적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고, 회담은 결과적으로 북한정권의 정통성 선전에 이용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냉전이 계속되어 마침내 2년 후 한국 전쟁으로 폭발해버리고 말았는데, 한국을 방문한 맥아더 장군의 요청으로 미국이 참전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가 가결되어 유엔은 최초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휘기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 회원국들의 군사적 원조가 미국의 지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결의안도 통과되어 최초의 유엔군이 편성되었고 맥아더를 그 총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 한국군의 지휘군도 넘겨 받아 그는 미군, 유엔군, 한국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한국 전쟁은 유엔군의 초반 열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과 중국의 인해술, 1 ․ 4 후퇴 등으로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되다 1953년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3여년 만에 끝났다. 이 한국 전쟁의 관련국 가운데 유엔군으로서 한국에 전투 부대를 파병한 나라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모두 16개국이다. 그리고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5개국은 의료 지원을 하였다. 또한 비UN국으로 일본이 비밀리에 해군을 참전시켰다. 공산군 측은 소련과 중국이 개입하여 전쟁의 주인공인 대한민국과 북한을 합쳐 모두 26개국이 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었다. 이처럼 제 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어 냉전을 겪다 마침내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일어나고야 만 것이었다. 

 

내용출처 : 네이버 지식인 cloud30127

 http://kin.naver.com/profile/cloud30127?p=1

나때는 말이야 [나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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